교포신문 : 정원교의 중인환시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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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2월31일 00시00분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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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교의 중인환시 (35)
개선문과 독립문
불란서 나폴레옹의 전승기념으로 세워진 개선문은 조금은 긴 이름으로 원명은 <아크 드 트름프 드 에뚜알,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며, 주변에 빠리 에펠탑과 노틀담 사원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 등의 유명건물 들과 가까이 하고 있다.
 
에뚜알(Etoile)은 불란서 말로 <방사형>이라는 뜻으로 개선문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로들이 벌려져 있다고 해서 붙혀 진 이름이다.
 
개선문에 올라가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여기를 중심으로 모두 12개의 방대한도로가 벌려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넓고 화려한 거리가 그 유명한 <샹제리제 (Avenue Champs Elysees) > 이며 직선으로만 2 킬로메타나 되는 길이이다.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8068월에 지시하여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1821년에 사망하게 되니 30년동안 이어진 공사 기간으로 완공을 보지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로마왕정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개선문 건축은 주로 황제의 업적이나 전쟁의 승리 또는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숨진 이들의 애국정신과 덕행을 기리기위해 세워졌다.
 
빠리의 개선문은 높이 50메터, 45메터,두께 20메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으로써 아치형 입구 아래에는 제1,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 묘지가 안치되어 있다.
 
또한 1940년 불란서 아라 (Arras)전투에서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우던 독일 롬멜(Romel) 탱크부대를 격퇴시켰고, 5공화국 18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샤를드골(Charles de Gaulle) 의 무덤을 개선문의 무명용사 묘지에 같이 안치하여 그의 명성을 기리고 있다.
 
서양에서는 사회적인 명예를 후대에라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개선문을 지었다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전승비나 대첩비 또는 공덕비를 세웠듯 주로 비석을 세워서 기리고 있다.
여기에 명예나 공덕을 다른 이들보다 더 널리 알리고자했다면 더 큰 비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각을 덧세우는 정도였다.
 
우리 나라에도 개선문을 모방하여 1987년에 완공한 <독립문> 이 있기는 하다. 로마나 빠리처럼 도로 정중앙에 우뚝 서서 독립문을 중심으로 길을 내어 준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길을 내어주기 위해서 도로중앙에서 비켜나야만 했던 비운의 독립문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우리 나라는 <로타리>의 개념을 알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서울의 독립문은 원래 세워졌던 넓은 길에서 현재의 독립문 공원안으로 옮겨져 있어 크기가 작은 것도 원인이지만 그 부근을 지나가더라도 보이지도 않아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조선은 자주 독립국>임을 외치며 건립된 <독립문>은 일제 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태종 7(1407)에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맞이하려고 세웠던 모화관(慕華館) 또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는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정책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책봉정책은 청나라가 <조선의 임금을 인정해 주는 제도>로 이조 때 왕이 결정되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허락을 받아 오던 정책이다.
 
이태리나 불란서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문을 세웠지만 우리 나라는 청나라로부터의 내정간섭에서 <독립>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나폴레옹은 1805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비엔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개선문 건설을 지시했다고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벌어진 영국과의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에서 전함 두 척만 남기고 전멸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랑대전에서 외적을 물리친 승전과 함께 이 트라팔가 전쟁도 세계 해군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전쟁사로 남아 있다.
 
명랑대첩이라고 불리는 명랑해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해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던 일본군이1597(선조30) 에 재 침공해오면서 일어난 전쟁으로 <정유년에 난이 다시 일어났다>고 해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나폴레웅은 이 치욕스러운 트라팔가 해전을 숨기기 위해 비엔나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물리친 것을 내세워 개선문을 짓도록 명령하지 않았나 싶다.
1805년의 우리나라는 순조 5년으로 정순왕후가 60세로 경복궁 자경전에서 승하하셨는데 정순왕후는 영조대왕(21) 66세 때 새 장가를 가면서 맞아들인 부인으로 시집 올 때의 나이가 15세였다.
 
나폴레옹은 벨기에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완패당하고 영국군에 항복한 후 영국영토인 세인트 헬레나 (St.Helena)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개선문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8215월 헬레나 섬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빠리 에펠탑옆 궁전같은 건물 앵발리드(Les Invalides)가 그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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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redaktion@kyoposhinmun.de)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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